TOUR 35 지방 투어
TOUR 35 공주 & 부여 관광

최소인원 :
3명
시간 :
08:00 ~ 18:00
요금 :
180,000원/1명
코스 : 호텔 - 공주 국립박물관 - 무령왕릉 - 낙화암 - 백화정 - 고란사 - 부소산성 - 호텔


부여
부여라 하면 한국민의 80% 이상이 백제의 수도였던 곳임을 알고 있습니다. 중학교 이상을 졸업한 사람이면 부여는 금강의 하류에 있는 충남의 군 소재지로 알고 있을 정도로 너무나 잘 알려진 곳입니다. 우리 나라의 250여개가 넘는 시ㆍ군 중 100여 년 이상 한 나라의 수도였던 곳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전국의 관광객이 부여를 찾아와 낙화암을 보고, 국립부여박물관을 보고 간 사람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잘 알려진 백제의 마지막 수도가 당나라 군대에 의하여 멸망되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부여는 백제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한번도 명칭이 바뀌지 않은 오랜 군으로서의 역사를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신라의 수도 계림은 신라가 멸망한 후 경주라는 명칭으로 바뀌었지만 부여의 명칭은 백제시대 이래 그대로 지금까지 군의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부여라는 나라는 우리 나라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가장 오래 전에 세워져 4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던 나라입니다. 결국 고구려에 통합되어 그 역사를 잃어버린 나라의 하나입니다. 이 부여에서 금와왕이 동쪽으로 옮겨와 지금 길림성 연길 지방에 동부여가 되었고, 그 일부가 다시 내려와 졸본성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지배층 일부가 다시 한강 남쪽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하였고, 백제는 한강유역의 위례성에서 고구려의 팽창정책에 밀려 공주로 천도하였습니다. 무령왕이 중흥을 이룩하기 위하여 천도의 계획을 하였고, 그 아들 성왕대에 수도를 부여로 옮겼습니다 부여는 공주와 함께 백제문화의 흔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곳입니다. 좋은 의미에서 부여는 완성된 백제의 문화모습을 보여주면서, 한편으로는 백제 패망의 아픔도 고스란히 전해 준다. 부여에는 왕궁지와 수많은 불교유적들, 왕릉유적, 그리고 부소산과 궁남지 등 발전했던 백제문화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그리하여 부여시대 백제로부터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았던 일본인 관광객들이 자기들의 문화 원류를 보기 위해 줄을 이어 찾고 있습니다.

국립공주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은 일제강점기에 공주지역 사람들이 백제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만든 공주고적보존회를 모태로 시작하여, 1940년 공주사적현창회(公州史蹟顯彰會)에서 조선시대 관아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이용하여 박물관 사업을 시작하였고, 해방이후 1946년 국립박물관 공주분관(公州分館)을 거쳐, 1975년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공주사적현창회시기부터 박물관으로 이용된 선화당은 1972년 현대식건물이 세워질 때까지 지속적으로 이용되고, 이후 국립공주박물관은 전시와 각종 문화 행사를 실시하며 지역민의 문화교육기관으로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최근 급격히 증가한 발굴문화재의 보존과, 국민들에게 폭 넓은 문화체험의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기 위해 2004. 5월 공주시 웅진동에 새롭게 개관하였습니다.

무령왕릉
충남 공주시 금성동에 위치한 송산리고분군은 무령왕릉을 포함하여 9기의 분묘가 조사되었으며, 13기 이상의 분묘가 분포되어 있습니다. 해발 높이 130m의 송산(宋山)을 북쪽의 주산으로 한 능선의 중턱 남사면에 분포되어 있으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이 있고 동북쪽에는 1-4호분이 있습니다. 1-5호분은 깬돌을 쌓아 만든 궁륭상 횡혈식석실분(둥근 천장의 굴식 돌방무덤)이며, 6호분과 무령왕릉은 횡혈식의 전축분(굴식 벽돌무덤)입니다. 석실분은 한성도읍기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무덤 양식이며, 전축분은 6세기초 중국 남조 양(梁)나라로부터 우리 나라에 전해진 무덤양식입니다.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송산리고분군이 백제 왕들을 모셨던 왕릉군임이 분명해졌고 공주 일원의 주미리, 교촌리, 금학동, 옥룡동 고분군이 동시기 귀족의 고분군으로 추정됩니다.1971년 7월 6일 송산리 5호, 6호분 배수로 공사중 우연히 벽돌무덤(전축분) 1기가 발견되었습니다. 무덤입구는 벽돌과 백회로 빈틈없이 밀봉되어 있었고, 도굴의 피해를 입지 않은 처녀분인 채로 조사되었다. 무덤의 입구를 열었을 때 왕과 왕비의 지석 2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습니다. 지석에는 백제 무령왕과 왕비가 돌아가셔서 이곳 대묘에 안장했다는 내용이 수려한 남조풍(南朝風) 해서체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1442년간 긴 역사의 흐름 속에서 조용히 침묵하였던 무령왕과 왕비가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각되어 백제사와 백제고고학 연구의 진일보를 알려주는 순간이었습니다.